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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땅의 연결: 아비뇽에서 나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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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아리 댓글 0건 조회 2,379회 작성일 06-05-28 2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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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09_500.jpg구약 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히브리인과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칭할 때 한결같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한다. 성경에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유독 세 사람의 이름을 거론하면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선민 이스라엘의 직접적인 조상으로 언약의 대상이고 나아가 대표적인 믿음의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즉 그들은 ‘이스라엘의 조상’이면서 ‘믿음의 조상’이다.
그러나 더욱 분명한 이유는 하나님이 자신을 그렇게 계시하시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야곱이 벧엘 광야에서 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하나님을 만났는데, 그때 하나님은 자신에 대해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했다. 그 후에 하나님은 미디안 광야에서 모세에게 “나는 아브라함,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그들을 언약 백성의 조상으로 삼고, 구속사의 중심적 위치에 세워 두셨다.
그런데 그들 중에서도 야곱은 여러 가지 점에서 특이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먼저 야곱은 직접적이고도 실질적인 차원에서 이스라엘의 선조가 된다. 이스라엘 12지파는 바로 야곱의 아들들이므로 어떤 의미에서 야곱 자신이 바로 이스라엘 백성이었고 민족이었다. 하지만 그런 대단한 인물의 인생 여정을 보면, 로마의 영웅들처럼 남성적인 기질과 의연함을 보여 주지 못하고 도리어 소인배와 같이 옹졸하며 또 속임수를 쓰면서 매우 계략적으로 살아왔음을 엿볼 수 있다. 이렇게 살아온 그를 하나님은 시련과 훈련의 단계들을 거치게 하면서 점점 믿음의 조상의 반열에 오르게 한다.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은밀한 훈련과 사랑의 첫 단계가 바로 이번 그림에 나타나는 광야에서의 꿈 사건이다.

야곱의 사닥다리와 서양 회화
창세기 28장은 야곱이 속임수를 써서 장자의 축복을 갈취하고 형 에서의 추적을 피해 고향 브엘세바에서 외가가 있는 하란으로 달아나는 장면이 회화적으로 묘사돼 있다. 야곱은 광야의 한 곳에 이르자 해가 지는 바람에 돌로 베개를 삼아 잠을 자는데, 땅에서 하늘 꼭대기까지 닿은 사닥다리가 있고 그 위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며 하나님께서 그 위에서 자신에게 축복하시는 꿈을 꾼 것이다. 이 신기하고도 회화적인 장면을 화가들이 놓칠 리 만무다. 이에 고래로 <야곱의 사닥다리>는 많은 화가들이 애호하는 소재가 되었다. 그러나 모든 그림들은 한결같이 비슷한 구도를 보이면서도 그 세밀한 부분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 중에서 16, 17세기 프란체스코 브리지오(Francesco Brizio)의 작품에는 야곱이 돌베개가 아니라 화려한 침상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다. 같은 시기에 나온 리베라(Jusepe de Ribera)의 그림에는 야곱이 중년 남성의 모습으로 팔꿈치에 의지해 누워 있는데, 사다리를 대신한 환한 빛만 하늘에서 비추고 있다. 17세기 렘브란트의 그림과 18세기 지오르다노(Luca Giordano)의 그림은 야곱이 이미 사다리 위에서 자고 있는 점에서는 비슷하지만, 전자는 하나님 형상을 단지 찬란한 빛으로 나타낸다. 누구보다 이 장면을 많이 그린 화가는 샤갈(Chagall)인데, 그의 그림에는 사다리 위에 하나님이 없는 것이 대부분이고 전통적으로 나타나는 야곱의 지팡이도 등장하지 않는다. 또 17세기의 피에트로 테스타(Pietro Testa)의 그림에는 야곱의 발밑에 강아지 한 마리가 누워 있다. 바티칸에 소장돼 있는 라파엘의 그림은 천사들이 둘씩 짝을 지어 사다리가 아닌 계단을 내려오고 있고, 하나님은 천지 창조에 나오는 모습으로 마치 하강하듯이 말씀하고 계신다.

사닥다리의 신학
회화란 모름지기 화가의 심상이나 사상 혹은 메시지를 색, 선, 형태로 형상화해서 표현해야 하므로 애당초 소재에 있어 적당한 형상이 나타난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것이다. 우리의 그림은 야곱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에서 사다리라는 좋은 형상이 나타난다. 물론 성경 본문의 기사를 볼 때 사다리 자체가 본질적인 내용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언약의 관계 형성과 말씀을 위한 사전적 준비로 하늘과 땅, 하나님과 야곱을 잇는 역할로 등장한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을 연결시킨다는 의미에서 화가들은 사닥다리를 중보자의 개념으로 해석하고자 했다. ‘야곱의 사닥다리’는 회화 사상 다양한 의미들을 가지고 있다. 이를 테면 그것은 일반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고 화해시키시는 중보자 예수님을 의미하기도 하고, 중세 천주교에서 성모 마리아를 상징하기도 했다. 그런 의미 외에 사다리는 인간이 하나님에게 오르는 상승의 길로서 고대의 후기와 중세의 많은 신비주의 사상가들에게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했으며 여러 가지 암시를 주었다.
초대 교회 시절 카르타고의 경건한 여성도였던 페르페투아(Perpetua)도 순교를 앞두고 하늘까지 뻗은 가늘고 긴 사다리를 환상 중에 보았고, 그 사닥다리로 올라 서기 위해 밑에 놓여 있는 큰 용을 밟고 가야함을 알았다. 이것은 어거스틴도 주장한 바 있다. 회화사적으로도 로마의 성 베드로 및 마르첼리노 카타콤에 있는 주후 4세기의 벽화에 사다리 아래로 큰 뱀이 놓여 있는 그림이 있고, 브리스길라 카타콤에 있는 18세 소녀의 비문에도 망자의 이름 옆으로 사다리 그림을 그려 영혼이 하나님께로 올라갔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중세의 수도자들은 하나님에게로 상승하는 길은 용으로 상징된 욕망과, 교만으로 사람을 미혹하는 사탄을 물리치고 금욕과 겸손의 사다리를 타야 한다고 했다. 이런 사상은 서방 수도원의 창시자인 누르시아의 베네딕트(Benedikt)나 동방의 대표적 수도자였던 요한네스 클리마코스(Johannes Klimakos)가 한결같이 표방하던 것이다. 특히 8세기 시내산 수도원 원장이었던 클리마코스는 동방 교회의 대표적 영성서 「천상의 사닥다리」(Scala Paradisi)를 통해 하나님에게로 오른 30계단의 소위 ‘사다리 신학’을 제창했다. 그 저서는 인간 영혼이 하나님과 하나 되는 신비적인 합일의 경지에 이르는 계단들을 단계별로 서술하고 있는데, 그 첫 번째 계단은 포기(抛棄)이고 마지막 30번째 계단은 믿음과 소망 그리고 사랑이다.
교회사에서 사다리는 천주교에서 말하는 소위 성인들의 속성으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를 테면 시에나의 베르나르도 톨레메이(Bernardo Tolemei), 노르웨이의 오올라프(Olaf)의 경우이다. 독일 레겐스부르크의 에머람(Emmeram)을 묘사하고 있는 그림에는 그의 순교의 도구를 뜻하는 것으로서 땅바닥에 놓여 있는 사다리가 나타난다. 후대에 사다리의 의미 부여와 해석들 외에도 성경 본문에 나오고 그림에 나오는 사다리 위를 오르내리는 천사들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메신저이면서 천상과 지상을 연결시켜 주는 고리이기도 하다.

광야의 깊은 밤에 임한 하나님의 은총
<야곱의 사닥다리>의 작가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1490년경 프랑스 남부의 아비뇽 화파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고, 현재 지오토(Giotto)의 작품 등 여러 명작들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이 도시의 소궁전박물관에 소장돼 있다.
중세 말기와 근세 초에 걸쳐 아비뇽은 교황권 논쟁의 진원지였다. 프랑스의 필립 4세는 교황청이 남부 프랑스의 자기 민족인 알비파를 대량 학살한 것을 계기로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기면서 14세기 말에서 15세기 초까지 로마와 아비뇽의 두 교황이 자신들이 서로 진짜 교황이라면서 투쟁을 벌였다. 그들은 성직 매매와 부정 축재, 축첩과 중과세 등으로 극심하게 부패해 있었다. 이런 암흑기 동안 많은 건축가들과 화가들이 아비뇽으로 모여 들어 그 후대에 이르도록 성당을 건축하고 각종 성화들도 남겼다.
우리의 그림은 작가 미상이지만 고향을 떠나 황량한 광야에서 여유롭게 잠을 자고 있는 야곱의 모습은 부패하고 오염된 천주 교회와 도시를 떠나 호젓한 광야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하나님과 영교하는 탈속적 신앙 세계를 지향하는 화가의 염원을 보여주는 듯하다. 사다리 뒤편으로 언덕 위에 서 있는 작은 교회는 작가의 심정을 더욱 잘 대변하는 듯하다.
그림의 전체적인 모습은 복잡한 상징물 없이 단순하고 등장 인물들과 사물들이 명쾌하면서도 두드러지게 표현돼 있다. 누워 있는 야곱이나 그 뒤에 있는 바위 등에서 잘 드러나듯이 힘차고 명확한 선묘기법, 정확하면서도 조형성이 있는 조소적 표현, 소실점을 낮춘 원근법에 따른 넓은 공간 구성, 생동적이고 장중한 장면 묘사 등의 특징들이 나타난다. 이런 특성들은 마치 동시대에 활약했던 이탈리아의 안드레아 만테냐(Andrea Mantegna)를 기억나게 한다. 그림을 보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굵고 딱딱해 보이는 야곱 의상의 주름들은 같은 해 나온 만테냐의 <죽은 그리스도를 위한 애도>(Pinacoteca di Brera, Milan)에서 그리스도의 의상에 나오는 주름과 매우 유사하다. 하지만 우리의 그림에는 만테냐에게 없는 밝은 채색과 서정성이 있다.
비록 하늘과 땅을 잇는 사다리가 비스듬하게 서 있지만 화면은 비교적 정교한 균형미를 보인다. 우선 천사들을 보더라도 사다리를 잡고 있는 그 오른손들이 상하 교대로 배치돼 있고, 사다리 좌우에 나무와 교회가 배치돼 있다. 그리고 누워 있는 요셉과 그의 손에 지팡이가 수평선을 그리고 있다면, 사다리와 바위 그리고 나무가 수직선을 그리고 있다.
하여튼 야곱에게 이곳이야말로 사다리를 타고 하늘로 갈 수 있는 ‘하늘의 문’이며, 또 하나님이 계시는 ‘하나님의 집’(Bethel)이었다. 하나님이 사다리 위에서 야곱에게 복을 주시고 있다. 하나님의 오른손은 야곱에게 복을 주시는 포즈를 취하고 있으며 왼손은 십자가가 있는 천구(天球)를 들고 있다. 천구는 본래 하나님이 계신 천국의 가시적 형상이면서 천상 세계의 완전성과 하나님의 절대성을 상징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므로 하늘과 땅의 피조 세계를 의미하며 그 위에 있는 십자가는 하늘과 땅 위에서 펼쳐지는 그리스도의 우주적 주권과 그의 나라를 뜻한다. 하나님께서 천구를 보이시는 것은 야곱에게 주신 복, 즉 온 세상 나라에서 그의 족속이 제사장 나라가 되는 복과 결부돼 있다.
사다리 옆으로 불모의 광야 언덕 위에 한 그루의 나무가 하늘의 하나님을 향해 수직으로 서 있다. 이는 영적으로 어두운 세상에서 아무의 도움도 없이 오로지 하늘의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믿음의 삶을 살아갈 야곱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나무가 서 있는 동산 아래로 굽이굽이 강물이 흐르는데, 이는 ‘복의 근원’인 야곱에게서 모든 족속으로 흘러갈 복의 강줄기이다. 나아가 야곱의 머리맡에 있는 하늘을 향해 치솟은 거대한 바위는 이미 떨어진 한 덩어리를 야곱이 베개로 하고 있는 것처럼,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의 피할 바위’(삼하 22:2~3)이신 하나님을 상징한다.
찬 서리가 내리고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광야의 깊은 밤, 부모의 품과 고향을 떠나온 도망자의 서글픔과 불확실한 앞날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어쩌면 영원히 귀향하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으로 잠 못 이루던 밤 - 그 밤에 잠시 잔 듯했는데 꿈속에 빛과 하늘로 뻗은 사다리, 그 위를 오르내리는 천사들, 부드러운 천상의 음성 - 아, 그것은 하나님의 방문이었고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야곱은 길 가는 나그네요 땅 위의 순례자를 상징한다.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현현은 이 땅의 모든 백성들에게 동행의 은총을 의미하며, 그에게 임한 하나님의 언약 말씀은 오늘날 그리스도들이 주님 안에서 향유하는 말씀과 모든 복을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저기 누워 있는 야곱은 바로 우리 자신이다.

**전광식-독일 레겐스부르그대학(Ph.D.)에서 철학 및 신학사상사를 전공했으며 지금은 고신대학교 교수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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