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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고 기도하라. 밀레의 에 나타난 노동과 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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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아리 댓글 0건 조회 2,513회 작성일 06-03-21 06: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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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20년이나 되었을까 필자가 유럽으로 공부하러 갔을 때였다. 어느 해 늦가을 독일 레겐스부르크의 교외로 산책하러 나갔다. 하루 종일 다니다가 귀가하기 위해 황량한 들녘의 외딴 정류장에 서 있었다. 그때 추수한 흔적이 남아 있는 들녘을 무심히 바라보고 있는데, 온 들녘이 황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지평선 너머로 너무나 크고 둥근 태양이 기울어가고 있었다. 그때의 아름다움, 황홀감은 세월이 흘러 지금도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또 한 번은 파리에서 몽생미셸로 가는 길이었는데,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작은 역에 내렸다. 그 역 바깥으로 펼쳐진 광활한 들판과 온 세상을 뒤덮을 듯한 넓은 하늘이 시야에 들어왔다. 그 순간 왜 프랑스의 많은 화가들이 자연을 그릴 적마다 화면의 절반을 넘어 4분의 3, 심지어 5분의 4까지 하늘을 그리는지 그 이유에 대해 깨달았다. 그들 대부분이 하늘을 굳이 강조하려 해서가 아니라 그저 눈에 들어오는 것을 그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 것에 비해 밀레의 <만종>은 화폭의 3분의 1을 하늘, 3분의 2를 땅으로 배치한 것을 볼 때에 작가가 땅의 모습, 땅 위 삶의 모습을 부각시키려 한 것을 알 수 있다.

밀레와 바르비종 화파
밀레(Jean-Francois Millet, 1814~1875)는 땅의 화가였고 흙의 화가였다. 1814년 10월 4일,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의 작은 마을 그뤼슈(Gruchy)에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난 밀레는 어려서부터 사계절에 따른 농촌의 삶에 익숙했다.
밀레가 농민들을 주제로 그림을 그린 것은 1849년 바르비종으로 이주한 후부터인데, 이전에 파리에서 체류했을 때 그는 초상화나 인물화를 주로 그렸고, 그 중에 여성의 누드화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피곤하고 복잡한 도시 문명과 파리의 혁명적인 분위기를 뒤로 하고 퐁텐블로 숲과 조용한 농촌 마을인 바르비종으로 들어가 작품 활동을 했다. 그 시기에 나온 작품들이 <씨 뿌리는 사람>, <건초를 묶는 사람들>, <이삭줍기>, <키질하는 사람>, <만종> 등이다.
밀레의 전환에 바르비종 화파의 가장 중요한 동료였던 루소를 비롯해 미셸(Georges Michel), 코로(Corot) 등 다른 화가들도 동참했다. 그들은 농촌의 풍경을 그리는 화가로서 작품 활동만 하지 않고 정부의 시책에 맞서 자연을 보존하려는 노력도 병행했다. 그로 인해 퐁텐블로 숲이 지금까지 보존돼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 사랑 받고 있다. 또 현재 이 숲 속에는 밀레와 루소를 기념하는 조상을 바위에 새겨 놓고 있다.
그들이 활동한 바르비종은 파리에서 남쪽으로 60㎞ 거리 퐁텐블로 숲의 끝자락에 있다. 거기서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1860년대 모네와 르노아르 등 인상파 화가들이 작품을 그렸던 샤이(Chailly) 마을이 있다. 따라서 밀레의 작품 활동은 자연히 인상파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밀레에게 영향을 받은 앞서 두 화가 외에 고흐나 피사로 등도 있다. 바르비종 화파의 회화들은 프랑스와 달리 신대륙 개척과 노동을 신성시하던 초창기 뉴잉글랜드에서 환영을 받았는데, 그로 인해 미국에서도 이킨즈(Thomas Eakins), 호머(Winslow Homer), 이니스(George Inness), 태너(Henry Tanner) 등과 같은 소위 ‘미국 바르비종 화파’가 생겨나게 되었다.

흙의 화가 밀레
옷자락에 흙이 묻고 얼굴에 땀이 흐르는 주인공들을 그린 밀레의 그림들은 화려한 의상과 온갖 장식으로 치장하고 늘 연회를 즐기며 열락을 구가하던 파리의 콧대 높은 귀족들과 살롱으로부터 외면당했을 뿐 아니라 혹독한 비난까지 받았다. 그런 비난의 핵심은 밀레가 가난한 노동자들을 부각시킴으로써 사회주의적 이념을 표방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들은 그렇잖아도 혁명의 분위기가 무르익은 당대 프랑스 사회에 밀레의 그림에서까지 노동자 혁명의 이념이 내재돼 있다며 속으로 두려움을 갖기까지 했다.
반면에 사회주의자들은 밀레의 그림을 대환영했다. 실제로 이 작품이 나온 지 수년이 지나 1871년 3월 18일, 파리의 노동 혁명가들은 위정자들을 축출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열흘 뒤에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열광한 세계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국가인 파리 콤뮨(Paris Commune)을 창설하기도 했다. 하지만 파리 콤뮨의 천하는 겨우 72일간 지속하다가 곧 붕괴되고 말았다.
1887년 5월 2일 피사로가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밀레는 혁명가들의 사상에 동조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레 피사로는 위대한 밀레의 두 편지를 공개했단다. 이 위대한 밀레는 분연히 콤뮨에 항거했고, 그는 그들을 야만인으로, 문화와 예술을 파괴하는 야만족으로 특징지었다는구나. … <괭이를 든 남자>라는 그림 때문에 사회주의자들은 밀레가 자신들의 편이라고 생각했단다. 그들은 이 화가가 많은 고통을 겪었고 농민 생활의 슬픔을 표현한 화가로서 자신들의 이념과 일치한다고 생각했단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내가 알기로 실제 그는 매우 성경적인 사람이었다.”

‘Labera et Ora’(일하고 기도하라)
서양 회화사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이후로 가장 많이 알려지고 사랑받는 작품은 아마 밀레의 <만종>일 것이다. <만종>이 밀레의 손을 떠나 벨기에와 미국을 전전하다가 고가를 지불하고 프랑스로 되돌아온 내력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작품의 인기는 이런 내력뿐 아니라 19세기에 가장 많이 복제된 작품이었다는 점에서도 유추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만종>의 인기는 무엇보다 작품이 풍기는 분위기와 그것이 표방하는 고상한 정신에 있어 보인다. <이삭줍기>가 고된 노동의 현장을 그리면서도 고요함과 평온함을 보여주는 반면, <만종>은 노동 이후에 찾아오는 안식과 종교적 경건함을 보여준다. 삶의 현장은 늘 소란스럽고 노동은 삶을 힘들게 하지만, 밀레의 그림들은 노동과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고상하며, 심지어 거룩하기까지 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루 해가 지고 벌써 저녁이 찾아왔다. 태양은 이미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지만 황금빛 낙조가 하늘과 광활한 들녘을 비추고 있다. 하늘과 땅과 온 들녘에 신비로운 저녁의 정적이 감돈다. 하루의 고된 일과를 끝낸 부부가 마주 서서 고개를 숙이고 있다. 남자 곁에는 감자를 캐느라고 하루 종일 수고한 삼지창이 주인처럼 휴식하며 서 있다. 여자 옆에는 자루 포대를 실은 손수레가 쉬고 있고, 그들 사이로 감자들이 담긴 소쿠리가 놓여 있다. 남자는 모자를 벗어 들고 고개를 숙인 채 묵상하고 있고, 여자는 몸을 앞으로 숙여 두 손을 모아 기도하고 있다. 그들은 오늘 하루도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있다. 그 순간 지평선에 놓여 있는 마을의 예배당에서 저녁 종소리가 들려 온다.
밀레가 이 그림을 그린 곳은 현재 프랑스 37번 국도 옆의 농경지로 바르비종과 샤이 앙비에르 마을 사이에 위치하고 있다. 그림에서 보는 마을은 샤이 앙비에르다. 밀레는 이 마을의 묘지에 루소와 함께 묻혀 있다.
밀레는 어려서부터 그의 할머니와 부모가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교회의 종소리가 들려오면 그렇게 기도하는 모습을 자주 보았다고 한다. 무엇보다 할머니는 그에게 신앙심을 심어준 경건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 장 루이 밀레는 마을 합창단을 지휘할 정도로 음악과 미술 등 예술에 조예가 깊은 사람이었다. 밀레는 부친의 예술적 재능을 물려받았고, 또 부친은 밀레에게 흙과 자연에 대한 사랑을 심어준 것으로 알려졌다. 밀레가 18세였을 때 부친은 밀레에게 가사에 대해 염려하지 말고 하고 싶은 그림 공부를 하라며 셰르부르로 보냈다.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들었다. 밀레는 귀향했지만, 이번에는 그의 어머니가 “하나님이 너를 화가로 만들었고, 또 너의 아버지의 유지가 그러하니 돌아가라”고 했다. 밀레의 인생에 가족의 정성 어린 후원이 있었고, 따라서 그의 그림에도 가족의 사랑과 신앙이 묻어난다. 밀레의 내심에서 <만종>의 모델은 바로 자신의 부모였던 것이다.
‘Angelus’는 13세기부터 시작된 일종의 기도인데, 하루에 세 번 행한다. 아침에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기도, 정오에 주님의 고난을 기념하는 기도, 저녁에 주님의 성육신을 기념하는 기도를 드렸다. 특히 저녁 기도는 중세 신학자 보나벤투라에 의하면, 천사가 밤중에 마리아에게 찾아왔다고 가르친 이래 성육신을 기념하는 기도로 자리매김했다. 하루의 세 번 기도 시간에 예배당에서 종을 울리는데, 이 종들에는 흔히 예수님의 탄생을 고지하는 천사의 인사말이 새겨져 있었다. 그런 연유로 ‘Angelus’라고 불렀던 것이다.
시계가 없던 시절에 하루 세 번의 타종은 하루의 일과를 시작하는 때, 점심 때, 일과를 끝내는 때를 알려주었다. 어쩌면 하루라는 것은 인생의 평생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나오는 저녁 기도는 인생의 황혼녘에 드리는 기도처럼 다가온다. 밀레가 소원했던 ‘농부로 태어나 농부로 죽는 것’도 아름다워 보이지만, <만종>이 보여주듯이 하루는 물론이고 평생을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와 더불어 살며 기도로 마감하는 삶’을 살았으면 하는 소원을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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