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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더가 알아야 할 7가지 키워드 -모험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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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아리 댓글 0건 조회 1,768회 작성일 04-09-12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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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험하라

< 리더가 알아야 할 7가지 키워드 / 존 맥스월>

:+: 세번쨰 키워드 - 모험하라 :+:

일이 어렵기 때문에 우리가 해낼 용기가 없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해낼 용기가 없기 때문에 일이 어려운 것이다(It is not because things are difficult that we do not dare; it is because we do not dare that they are difficult) - 세네카



■ '흑인들의 모세'라 불린 리더

해리엇 터브먼(Harriet Tubman, 1920~1913): 미국의 노예제 폐지론자. 남부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 탈출해 남북 전쟁이 일어나기까지 노예제 철폐에 앞장섰다. ‘지하 철도’(노예들을 탈출시킬 목적으로 만들어진 치밀한 비밀 조직으로 여러 은신처로 이루어져 있다)의 탈출로를 따라 수백 명의 노예들을 자유로운 북부로 이끌었고 이러한 활약으로 ‘흑인들의 모세’로 알려졌다.

그녀는 그다지 인상적인 외모를 가진 여자가 아니었다. 30대 후반의 나이에 그저 150cm 좀 넘는 키에 흑갈색의 건조한 머릿결을 가진 여자였다. 그녀는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다. 그녀가 입고 있는 옷은 단정해 보였지만 다 헤어지고 찢어져 있었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사람들은 그녀의 앞니 두 개가 없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혼자 살았다. 소문에 따르면 스물아홉 살 때 남편을 버리고 집을 나왔다고 한다. 그녀는 남편에게 경고의 말도 하지 않았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것이었다. 이 일이 있은 지 수년 후 그녀는 단 한번 남편에게 말했을 뿐 이후로 다시는 그의 이름조차 언급하지 않았다.

그녀는 직장도 다니다 그만두었다 했다. 대개는 작은 호텔에서 잡일을 했다. 바닥도 닦고 방 정리도 하고 음식도 했다. 하지만 매 봄과 가을에는 취직한 곳에서 사라졌다. 그리고는 빈털터리가 되어 돌아왔다. 쥐꼬리만큼의 돈이라도 벌기 위해 다시 일을 했다. 한번 취직하면 열심히 일했고 육체적으로도 강인해 보였다. 하지만 갑자기 쓰러져 잠이 들 때는 발작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녀는 이런 고통이 십대 때 싸우다가 머리를 맞아서 그렇다고 했다.

이런 여자를 누가 존경하겠는가? 그러나 그녀를 존경하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그녀를 따라 남부에서 탈출하여 자유를 얻은 노예들이었다. 그들은 그녀의 리더십을 보았고 그녀를 존경했다. 뉴잉글랜드에 있는 노예제 폐지론자도 모두 그녀를 존경했다. 때는 1857년이었고 그녀의 이름은 해리엇 터브먼이다.

지하 철로의 안내자: 해리엇 터브먼은 30대 나이에 ‘모세’라고 불렸다. 포로 지역에 들어가서 수많은 동족들을 노예의 속박에서 풀어 냈기 때문이다. 터브먼 자신도 노예로 태어났다. 1820년에 태어나 메릴랜드의 한 농가에서 자라났다. 열세 살 때 그녀는 머리를 맞았는데 그 통증이 평생을 따라다녔다. 어떤 가게에서 한 백인 감독관이 도망가는 노예를 때리고 있었는데 그녀에게도 동참하게 했다. 그녀가 이를 거절하고 감독관의 길을 막자 그는 터브먼의 머리를 향해 1kg이나 되는 쇳덩이를 던졌다. 그녀는 거의 죽을 뻔했다.

24살에 그녀는 존 터브먼과 결혼했다. 그는 자유를 얻은 흑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자유를 찾아 북으로 도망가자는 얘기를 했을 때, 그는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떠나려 하면 그녀를 돌려보내겠다고 말했다. 1849년 마침내 그녀가 기회를 잡아 북쪽에 가기로 결심한 뒤 그녀는 남편에게 한마디 말도 없이 홀로 그 일을 단행했다. 그녀의 첫 번째 자서전 작가인 사라 브래드포드는 터브먼이 해 준 말을 기록해 놓았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마음속에서 논리적으로 생각해 봤어요. 내가 갖고 있는 권리는 둘 중 하나였죠. 자유 아니면 죽음. 이것 아니면 저것을 가져야 했어요. 왜냐하면 아무도 날 살려 둘 리 없기 때문이죠. 나는 힘이 다할 때까지 자유를 얻기 위해 싸워야 했습니다.

터브먼은 지하 철로를 따라 펜실베니아 주의 필라델피아로 향했다. 이 길은 자유를 얻은 흑인들과 노예제 폐지를 주장하는 백인들과 노예들의 탈출을 도와주던 퀘이커 교도들의 비밀 도로망이었다. 그녀는 자유의 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메릴랜드로 돌아가서 가족을 데려오겠다고 맹세했다. 1850년 그녀는 지하 철로의 ‘안내자’로서 첫 번째 귀환 여행에 성공했다. 지하 철로의 ‘안내자’란 동조자들과 함께 노예들을 구출해 내서 북부까지 인도해 주는 사람을 말했다.

■ 강철 같은 리더

여름과 겨울이 되면 터브먼은 남부로 돌아갈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일했다. 그리고 봄과 가을이 되면 목숨을 걸고 남부로 가서 더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귀환했다. 그녀는 겁이 없었다. 그녀의 리더십도 흔들림이 없었다. 이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었다. 데리고 나오는 사람들이 동요할 때면 그녀는 강철처럼 강해졌다. 탈출을 시도하다 실패한 노예들이 심하게 맞고 고문을 당해서 결국에는 자신들을 도와준 사람들에 대한 정보를 누설하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녀는 이끌고 나온 사람들 중 한 사람도 중도에 포기하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그녀는 마음이 약해진 노예의 머리에 총알을 장전한 권총을 들이대며 말했다. '죽은 사람은 아무 말을 하지 않아요. 당신은 계속 가지 않으면 죽어요!'

1850부터 10년 동안 해리엇 터브먼은 300명이 넘는 사람들을 인도해 냈다. 그중에는 그녀의 가족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녀는 19번의 여행을 했고 자신이 이끌고 나오던 사람들 중 단 한명도 잃지 않았다는 사실에 자랑스러워했다. 그녀는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한번도 열차를 철로에서 탈선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단 한명의 승객도 잃지 않았죠.” 남부의 백인들이 그녀를 잡아들이기 위해 만이천 달러를 걸었다. 그 당시로는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남부의 흑인들은 그녀를 ‘모세’라고 불렀다. 남북 전쟁이 시작될 즈음 그녀는 미국 역사상 그 누구보다 많은 흑인들을 노예제의 속박에서 구출해 냈다.

■ 행동으로 보여 준 리더십

터브먼의 명성과 영향력으로 인해 사람들은 그녀를 존경하게 되었다. 자유를 꿈꾸는 노예들뿐 아니었다. 흑인과 백인의 영향력 있는 북부인들은 그녀를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그중에 윌리엄 시워드 상원 의원도 있었는데, 그는 나중에 에이브러햄 링컨의 내무 장관이 된 사람으로서 적극적인 노예제 폐지론자였다. 그리고 그도 한때는 노예 프레드릭 더글라스였다. 그뿐 아니라 유명한 혁신적 노예제 폐지론자였던 존 브라운도 터브먼의 충고와 리더십을 듣고자 요청했다. 브라운은 언제나 그녀를 '터브먼 장군'이라고 부르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녀는 내가 본 어떤 장교보다도 훌륭합니다. 그녀에게 군대를 맡긴다 해도 그녀는 몇 명의 탈출자들을 인도할 때처럼 성공적으로 통솔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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