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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정신은 고요히 인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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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운영자 댓글 0건 조회 1,408회 작성일 05-05-27 1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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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어제적의 일처럼 회상되는 일이 벌써 20여년을 넘겼다.
경운기를 끌고 나오면서도 당당하게 손을 내밀어 결혼을 제의한 남편의 손에 이끌려 이 곳에 들어왔고 부부란 동지적인 삶이 있어야 한다는 시아버님 말씀에 지금껏 그 말씀을 어기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아온 세월이기도 하다.

1950년에 이 곳에 정착하시면서부터 세계의 중심을 기도했고 그 기도의 실현을 위해 최선을 다해 살아온 시부모님의 끊임없는 노력이 지금의 아리랜드를 이어올 수 있는 힘이 되고 있다.
육종업계에서 함께 했던 어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우리나라 십자화과 채소의 육종을 위해 업적을 남기시고 내면의 빛을 위한 퀘이커 활동과 이미 1970년초에 대두되었던 유기농에 관심을 갖고 정농회원이 되어 활동하심으로 오늘의 아리랜드가 생명과 농업을 이어갈 세계의 중심을 향해 나갈 수 있는 기틀이 되었다.

아버님의 뜻을 이어 남편은 마을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1981년부터 마을 청년과 함께
‘명농당’이라 명명된 조그마한 공간을 만들어 마을을 살리고 우리나라 농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깊은 논의를 계속했다. ‘열린이웃’이란 소책자를 발간하며 농촌에 거주하는 사람들과 도시에서 사는 사람들의 생각을 교류하기에 이르렀고 마을 청년들과 함께 생산, 판매, 가공, 유통의 네 발판을 위해 도시민과의 직거래를 시작하여 도시와 농촌의 가교역할에 큰 활력을 불어 넣었다.
우리나라 농업의 문제가 유통에 있다고 판단하여 도시의 소비자 50여 가족을 위해 마을 주민이 생산한 농산물로 일주일분의 식량을 마련하여 한 박스당 2만원 상당의 가격으로 안정된 생산과 판매를 이룰 수 있었다. 도시의 소비자에게는 신선한 먹거리, 안정된 식품으로 환영을 받았고 마을에서는 안정된 소비처로 인해 안정된 농사를 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서천에서 서울까지의 먼 거리로 인한 문제점은 곧 마을 생산에 영향을 주었고 도시 소비자들의 늘어나는 요구사항으로 처음 의도하던 바와는 달리 원활한 유통이 되지 못했다.
그 와중에도 점차 공동체의 역할이 커나가자 영농법인 열린터 생명공동체로 14가족이 중심이 되어 규모를 확대하였고 서울 지역은 계절 직거래로 남겨 놓고 가까운 지역을 순회하며 유기농산물의 판매를 계속하던 중 또 하나의 가공생산으로 죽염을 생산했다.
지금의 죽염장류가공(해가마을)의 효시가 되었고 농촌의 소득 사업으로 고부가가치를 올릴 수 있는 좋은 사업이었으나 소비자의 성향이 변화가 심했고 매스컴의 영향이 많아 꾸준한 성장을 이루지 못했다.

그래도 마을 주민들의 희망을 안고 출발한 공동체였기에 임원을 중심으로 한 몇 몇의 사람들은 매달렸으나 점차 소비와 생산의 구조가 맞지 않아 공동체의 위기가 닥쳐오기도 했다.
소비자를 찾아 익산, 군산, 서천, 장항의 아파트와 교회를 순회하였으나 넘치는 물량을 판매하지 못해 관행농법으로 지은 농산물과 함께 유통되었고 공동체원들의 많은 원성은 더욱 힘이 들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
65세 이상의 독거노인들이 회원이었고 젊은이가 없는 상태에서 생산과 유통과 교육을 한꺼번에 해결하려 했던 것과 이상적인 농촌의 모습을 추구하며 강행하려 했던 우리의 노력이 현실과 부합되지 않은 모순에서 많은 갈등을 겪어야만 했다.

1996년 초에 마을경제 회복에 대한 많은 회의감을 안고 방향을 바꿀 것을 제의했다.
청운의 꿈이 가득한 우리의 노력은 경제적인 결과로 나타나지 않았고, 이 일에 대한 명분을 줄 수 있는 것조차 건질 수 없을 정도로 지쳐가고 있었다.
소비자들에게 우리의 농사철학과 농촌의 현실을 알리면서 농산물을 구입해 주기를 원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고 마을주민과의 갈등도 야기되었다.
마음속에 이는 공동체원에 대한 원망과 판매하면서 느끼는 알 수 없는 열등감, 확신이 서지 않는 내부의 자괴감이 우리가 길에 대한 회의감을 안게 되었다.

직거래 형태로 약 10여년을 계속하던 우리는 찾아다니는 농업에서 소비자가 직접 방문하는 농업으로 전환하게 되었고 그 일환으로 1996년에 제1회 동백축제를 열게 되었다.

이미 1960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튜울립, 히야신스를 심어 노지재배에 성공한 아버님을 생각해 내었고,그 당시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 온 자료를 보게 되었다.
맑은 공기와 아름다운 전원에서 안전한 먹거리를 생산해 내는 곳으로 찾아오게 한다면 경쟁력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준비했다.
아직도 간직되어 있는 농촌 모습과 우리의 철학이 들어있는 농산물, 활기가 넘치는 농촌의
모습을 상상하며 마을 주변을 가꾸기 시작했다.
마을 중앙에 위치한 아리랑농장(아리랜드)은 일찍부터 시아버님이 황무지를 개간하여 7-80년된 동백나무가 백여 그루T 서 있고, 그 밑으로 수선화 십만여 송이, 그리고 각종 나무와 새들의 노래가 귾이지 않는 50여년된 농장이었고, 마을전체 경관으로는 마치 곡식을 가려내는 키와 같은 형태로 아름다운 마을이다. 이 마을이 전체 꽃동산이 되는 4월을 축제기간으로 정하고 그 동안의 직거래로 맺어진 소비자들과 자연스런 만남으로 아름다운 환경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은 자연스레 판매가 되어 농민이 도시의 아스팔트를 뛰어다니며 농산물을 홍보하던 일에서 생산에 전념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이 축제를 계기로 우리 마을은 많은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고 도시민이 찾아오는 농촌이 되었으며 마침 농협팜스테이 마을로 지정되어 본격적인 도농교류의 장을 열 수 있었다.
여름휴가를 이용하여 마을을 찾던 소비자들이 팜스테이를 하면서 느꼈던 농촌의 정서를 인터넷에 올리게 되었고 그 결실이 1999년 8월 105명의 소시모 회원들의 방문은 합전마을과 아리랜드의 도약을 가져올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팜스테이 공동체 23가구를 만들기에 이르렀다. 우선 민박할 수 있는 방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이부자리며 주변을 정리하는 것으로 손님을 맞이하기로 결정하고 농사체험과 농촌의 신선한 먹거리, 밤하늘의 반짝이는 별조차도 상품이 되었던 첫 해에 우리는 많은 감격을 안고 마을을 찾아오는 방문객들을 맞이할 수 있었고 2000년도에는 한 해의 방문객이 1,000여명에 이르게 되었다.

마을에 변변한 시설도 없는 상황에서 낡은 마을회관과 교회 교육관을 전전했고 아리랜드 잔디밭에서, 때로는 해변가의 모래사장이 식당이 되고 잠자리가 되어 우리가 가진 여건을 최대한 활용하였다.
또한 2000년 10월에 홈페이지를 개설하여 막연하게만 생각되던 소비자들과 직접 대화할 수 있게 되었고 그 동안 농사를 지으면서, 직거래를 하면서, 마을의 역량을 키우는 일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올리며 도시민들과의 교류를 트게 되었다.
2001년도에 서천농업기술센터의 추천으로 전국에서 처음으로 두 명의 여성농업인이 그린투어와 전통장류 신지식으로 선정되었고 한갑수 농림부장관의 그린투어 현장 설명회가 합전마을 아리랜드에서 열렸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전국의 많은 마을들의 답사가 이뤄졌고 행자부의 아름마을로 선정되어 마을을 다시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마을을 이끌어가는 사람들은 주도적인 지도자 몇 사람이지만 그 일을 뒷받침 해주는 보이지 않는 힘은 역시 마을 주민들의 무던한 인내력의 힘이 가장 컸다.
마을의 합의에 의해 이뤄져야 하는 마을가꾸기 사업에 우리는 아름마을 협의회원으로 등록을 했고 협의회대표를 뽑아 마을 주민들이 수시로 모여 협의를 했고 그 후에 협의 회장은 마을이장에게 권한을 주는 것이 타당하다 하여 마을이장의 모든 책임을 맡아 일을 진행했다.
2002년에는 정보화마을로 선정되어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는 시간을 빠르게 했고 팜스테이 마을로 교류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특히 마을의 젊은이들에게는 경쟁력을 갖게하여 농림부에서 주최하는 홈페이지 경진대회에 두 농가가 우수상을 받는 쾌거를 이루면서 정보화에 앞장서기도 했다.
또한 제1회 마을 가꾸기 경진대회에서 우수상을 받게 되어 이 수상을 계기로 주민 30명이 일본 농촌을 4박 5일 동안 연수하면서 그동안 우리가 노력하였던 일에 대해 평가를 했고 앞으로의 가능성을 확인하면서 세계속의 농촌 흐름을 파악하는 시간이 되었고 마을일에 대한 역량을 강화하는 계기도 마련했다.
2002월드컵 이후의 한국 농촌사회를 스케치하고 어떻게 변모하는지에 대한 일본 NHK방송의 방영은 합전마을의 변모를 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어 외국인들과의 교류도 틀 수 있었던 것과 2003년 LG정유에서 고객을 대상으로 실시한 인터넷 응모에 상품으로 합전마을의 팜스테이를 내걸어 우리나라 1사1촌 운동의 뿌리가 되는 역할을 해낸 일등은 지금도 가슴 뿌듯한 일로 기억된다.
농촌과 대기업의 만남은 생산과 판매, 유통에서 희망을 갖게 했고 고객이 농촌을 찾아올 수 있게 만드는 계기가 되어 희망을 싹트게 했다.

2003년 12월에 아름마을 사업을 마무리 하면서 마을 숙원 사업이었던 부분들이 해소 되었고 마을 주민 전체가 마을 가꾸기에 합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음식접대에 마을 부녀회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시골밥상의 인정과 담백한 맛을 자랑하게 되었고 마을 생산물을 공동 판매하는 일에 더욱 매진하게 되어 소득향상이 되었다. 이 공동기금은 마을 조경과 공동 구매, 연수 등으로 마을 발전에 큰 활력을 주고 있다.
특히 계절 직거래로 10여년 이상을 함께 해 준 도시교회들과 여성단체들의 협조는 우리 마을이 발전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귀한 만남이다.

이러한 일들은 2001년도에 농림부에서 지정한 여성농업인센터를 유치하면서 마을은 많은 활력을 갖게 되었다.
여성농업인센터는 여성농업인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사업으로 새댁이 들어와 살고 싶은 마을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보육과 방과후 교육, 여성농업인의 상담 및 여성농업인 교육을 하는 사업으로 민간위탁사업인다.
농촌에 거주하는 여성농업인이 대표가 되어 농촌에서의 삶 속에서 이뤄져야하는 사업을 직접 기획할 수 있는 사업으로 가장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사업을 먼저 해소하고자 노력했다.
아이들 교육에 대해 많은 고충을 안고 있는 여성농업인들을 위해 마음 놓고 생산에 전념할 수 있도록 아이들에게 부모와 함께 하는 정을 느끼도록 교육의 터를 마련하고 또한 여성농업인들이 그동안 터놓고 나누지 못했던 부분에 대해 진지한 대화를 통해 고충을 해소하도록 노력했다. 또한 농외소득 부분에 대해 주력하여 경제력과 경쟁력을 갖도록 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이 일과 맞물려 마을 가꾸기 사업을 연계하여 여성농업인이 주도적으로 나설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고자 교육을 실시하였고 농촌의 희망으로 여성농업인이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계기도 마련하였다.
여성농업인이 단순한 보조자의 역할이 아니라 공동경영자로서의 주체를 갖도록 하고 농촌의 정서가 여성성인점을 감안하여 마을 경관 자체가 하나의 상품이 되는 일에 눈을 뜨게 하였다. 마을 공동체에도 적극 참여하여 여성농업인의 주장이 관철되게 하였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 정보화에 밝은 눈을 갖도록 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농산물 생산과 환경 보전의 두 틀이 잘 진행되어 지속적인 농촌발전을 이루려는 여성농업인의 노력이 한 마을을 일으키게 되었고 주변의 마을에 영향력을 며 이 일이 전국에 확산되어 농촌의 희망이 되기를 원하는 여성농업인센터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

합전마을은 잠시 멈추고 있다. 전국의 많은 마을들이 정부 각처에서 진행라고 있는 사업으로 활기를 띠고 어느 때보다도 열기를 더해 가고 있는데 오히려 합전마을은 조용하다. 잠시 쉬고 있는 듯 하고 퇴보하고 있는 듯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앞만 보고 달려 온 세월에 잠시 뒤를 돌아보고 있는 중이다.
너무 달렸기 때문에 보지 못했던 우리들의 이야기, 어르신들의 염려, 마을 역사에 대한 고증을 다시 점검하고 있다. 물질로는 환산할 수 없는 정신적인 가치를 재발견하는 일은 우리가 해내야 할 숙제이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마음에 상처가 있던 주민들과 다시 대화하고 조그마한 들꽃을 보지 못하고 화려함에만 치중했다면 흙과 더 가까이 하여 우리 것을 회복하는 일에 치중하고 있다.
또한 이 일에 관해 서천군과 농업기술센터, 그 밖의 전문 기관들, 전국의 지도자들과
네트워크을 형성하여 자문을 받고 있다.

2005년 2월은 나에게 또 다른 의미를 갖게 하는 유럽농촌 연수기회를 다녀왔다.. 늘 궁금했던 세계속의 여성농업인들의 교류를 생각했고 그들과 직접만나 공유하고 있는 부분을 확인하고 싶었으며 미래의 농촌을 예측하고 싶었다.
꿈같은 시간이었고 원하던 일이었기에 누구보다도 열심히 그들을 만났고, 대화하며 눈빛으로, 몸짓으로 교류했다. 그 곳에서 만난 여성농업인들의 한결같은 열정은 잠시 침체되어 있던 나에게 또 다른 도전이 되었고 서로의 교류도 약속했다.
특히 독일의 쉐마스호프 공동체에서의 만남은 나를 다시 일어서게 했고 내 인생 후반기를 걸어가는 노정기와 같은 일이 되었다. 슈타이너 인지철학에 농법을 더하여 유럽 전역의 유기농산물을 생산해 내는 공동체를 방문했을 때 우리를 맞이한 사람은 31세된 젊은 부부가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에서 20년전 우리 가족으로 환원이 되었고 그 때의 결심을 다시 상기시켰다.
남편과 아이를 업고 공동체에 매달려 있던 내 모습, 외면하던 농촌을 다시 일으키고 싶었던 그 때의 결심을 나는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가.
그 때의 순수한 열정을 잊어버리고 스스로 지쳤다고, 한계를 느낀다며 불평하며 서 있는 내 모습을 잠시 되돌아보았다.
20여전에 우리가 지니고 있던 마음을 이 먼 이국땅에서 확인하고 있는 순간
‘위대한 정신은 고요히 인내하고’ 있음을 알았다.
내가 잊었는가 싶어도 어느 곳에서 계속되고 있는 일, 그 일이 위대한 정신을 소유한 일이라 사라지지 않고 이 곳에서 확인하며 소명을 갖고 계속할 수 있도록 용기주고 있음에 경이감을 느꼈다.

올해로 어김없이 동백축제를 열었다. 특히 10주년을 맞는 때라서 어느 때보다 더 감회가 있는 자리에서 우리가 하는 일은 위대한 정신을 계승하는 일이며 이 일을 위해 계속 정진할 것이며 이 곳을 찾는 이들과 서로의 감동을 받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곳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공표했다.

앞으로 남아있는 일은 후손에게 자랑스런 조상이 되는 일이다.
우리의 후손들이 이 농촌을 지켜간 조상들에 대해 위대한 정신으로 고요히 인내하며 이곳지켜내었다고 고백하는 모습을 그리면서 오늘을 걸어간다.






“이 땅이 세계의 중심이 되게 하소서 !”

나 이 땅에 한 씨을 심었네,
우리의 생명과 농업을 보전할 !
난 기도했네 이 땅이 세계의 중심지 되길

그리고
난 바라보네 언젠가 이루어질 아름다운 세계를
정 순 보 (1913-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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