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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이음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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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애순 댓글 4건 조회 1,877회 작성일 08-08-20 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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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축제’로 대이어 우리나라 대표농장으로 만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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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애순(50.오른쪽).정의국(52)씨 부부가 3대째 이어지는 아리랜드 농장에서 활짝 웃고 있다.
[25회 영농수기 당선작] 인생의 이음줄-최애순〈50·충남 서천군 마서면 남전리〉

해로 열세번째 ‘동백축제’를 열었다. 해마다 4월 둘째주 토요일이면 어김없이 내가 사는 곳, 충남 서천군 마서면 남전리 합전마을을 찾아오는 사람들의 발길이 연륜을 더하고 있다. 동백축제가 열리는 마을, 유기농산물 마을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아리랜드는 토종과 유기재배만을 고집하며 60여년의 역사를 지닌 농업의 대물림이 3대째 이어지는 곳이다. 합전마을의 중심에는 70년 이상 되는 동백나무 150여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다. 일찍이 시아버님 고(故) 정순보님이 심고 가꾸었던 동백나무 사이로 이른 봄철이면 붉은 동백꽃이 만발한 가운데, 땅에서는 10여만본의 수선화가 만발하고 목련과 왕벚꽃·야생화가 앞다퉈 피어 이곳을 찾는 손님들을 향해 환영의 손을 흔든다.

‘농촌의 희망은 찾아오는 농업으로’를 목표로 조성된 동백숲 한가운데에 마련된 아리랜드의 무대에서는 다양한 음악회와 장기자랑이 펼쳐진다. 한켠에선 부침개며 지역특산물로 만든 정성어린 음식들이 차려지고, 또 서천의 농특산물을 알리는 즉석 직거래장터도 열린다.

충남 서천이 농촌의 자랑스런 어메니티 중심지역으로, 또 도시민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올바른 먹을거리를 생산하는 농민들이 직거래 장터를 열게 된 것은 비단 하루 이틀에 이뤄진 일은 아니다.

농촌진흥청 원예시험장에 근무하던 남편(정의국·52)은 1981년 시아버님의 가업을 잇기 위해 귀농했다. 그러나 농촌 현실은 교육과 경제적 여건 미비로 떠나는 젊은이들이 많았고, 이로 인해 마을이 텅 비는 공동화가 이뤄지고 있었다. 농촌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경제기반 확보가 시급함을 깨닫고 사랑채에 ‘명농당(明農堂)’이란 현판을 걸었다. 동네 청년들의 사랑방이 되도록 한 것이다. 또 처음 뜻을 같이한 3가족이 ‘열린이웃’ 공동체를 결성, 마을에서 나오는 농산물은 무엇이든 상품이 되도록 만들었다. 농산물 직거래, 농산물가공을 위한 공장 설립, 유기농산물을 직접 식탁에 올리는 마을식당 운영을 목표로 실행에 옮겼다. 1987년부터 서울의 50가구를 주소비자로 삼아 일주일에 한번씩 서울을 왕래하는 일을 시작으로 연고가 닿는 교회로, 아파트로 보따리장수가 되어 뛰었다. 어느새 공동체는 회원 참여가 많아져 14명 조합원과 후원자들로 ‘열린터 생명공동체’ 영농법인을 설립하게 되었다.

‘땅에서 난 것을 땅으로 되돌려주는’ 자연순환농법으로 유기농산물을 생산해내는 체계를 구축하고 소량다품목에 주력했다. 공동체 식구들의 인력을 활용할 방안으로 죽염을 생산하게 됐다. 우리 합전마을은 바닷가에 위치해 있어 천일염은 물론 황토·소나무·대나무를 구입하기가 수월해 죽염 생산이 가능했다. 죽염으로 인한 부가가치는 높았다. 밤낮없이 일하면서도 얼굴에는 즐거움이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고품질만으로는 승부가 나지 않았다. 또 소비자를 일일이 찾아다니며 설득하고 판매하는 일도 엄연히 한계가 있었다. 과잉생산된 농산물은 제값을 받지 못한 채 공판장에 넘기는 일이 생기면서 공동체는 위기에 처하게 됐다. ‘합전마을 주식회사’를 꿈꾸던 남편은 조롱과 외면을 받게 됐다. 의욕만 앞섰지 현실의 벽은 높았다. 공동체에 대한 인식이 부족해 요즘 말로 ‘소통 부재’의 상황에 빠져버렸다.

깊은 수렁에 빠져 있다보니 가슴 밑바닥에 와닿는 것이 있었다. 생각을 바꾸자. 지금까지는 내가 소비자를 찾아 도시로 나갔다. 이젠 도시 소비자들이 나를 찾아 농촌으로 오도록 해보자고 생각했다. 뭘 믿고 도시민들이 나를 찾아 이 먼 농촌으로 올까를 궁리했다. 한참 생각하다보니, ‘농업을 문화적인 입장에서 축제와 연결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인위적이지 않으면서도 이곳에 찾아오는 방문객들이 최고의 선물을 담아 갈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그래서 시도한 것이 ‘동백축제’였다. 마침 시아버님이 1960년대에 튤립과 히아신스 등 알뿌리를 전국 최초로 노지재배하는 데 성공해 많은 사람들이 집으로 찾아온 일을 기억해냈다. 아리랑 육종농장(아리랜드의 전신)의 여러 화훼자원을 활용해축제를 벌이기로 했다.

1996년 4월, 드디어 제1회 동백축제를 열었다. 축제라고 해봤자 특별한 것은 없었다. 그저 주변을 잘 정리하고 마을에서 생산되는 농산물로 정성껏 대접하는 일이었다. 전에 알던 도시 소비자들에게 ‘자연이 주는 최고의 무대로 초청한다’는 초청장을 발송했다. 그리고 축제무대의 주인공은 소비자임을 강조했다.

먼 곳에서 혹은 가까운 곳에서 온 손님들이 준비해온 연주·무용·시낭송 등은 기대 이상이었다. 서로 마음과 예술, 그리고 자연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됐다. 우리는 답례로 유기재배한 시골 밥상을 한상 가득 차려냈다. 방문객이 많아 마을로 오는 교통이 마비될 정도였다. 조용하던 마을에 활기가 넘쳐났다. 축제가 어찌 지나갔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농사일만 하던 우리가 감당하기에는 벅차기도 했다. 축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부류라 단정 짓고 한해의 행사로 마무리 지으려 했다.

그러나 이듬해, 첫해 방문했던 방문객들의 문의전화가 쇄도해 첫회의 부실한 부분을 보완해 2회 동백축제를 열게 됐다. 그런데 이것이 계기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1997년 서천군농업기술센터의 도움을 받아 축제가 열리는 아리랜드 주변을 손보게 됐고, 1999년 농협중앙회가 주관하는 팜스테이마을에 우리 합전마을이 선정된 것이다. 축제와 더불어 연중 찾아오던 방문객들에게 쉼터와 먹을거리를 제공하고 농산물을 판매하는 등 마을 여건을 최대한 활용하는 데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야트막한 6개의 구릉지로 둘러싸여 논밭이 넓게 펼쳐진 조개 모습의 마을 풍경, 그리고 앞에는 서해안의 넓은 갯벌이 자원이 돼 언제든 바다체험이 가능한 것도 장점이 됐다. 숙박과 식사 준비 등 찾아오는 방문객들에게 최선을 다한 서비스로 모셨다.

때마침 농촌에 불기 시작한 인터넷 바람은 우리 마을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한번 다녀간 방문객들이 인터넷에 소개한 우리 마을을 보고 점차 찾아오는 방문객들이 늘기 시작했다.

1999년 8월10일, 105명의 소비자를 생각하는 시민의모임 회원이 한꺼번에 우리 마을을 찾았다. 마을 형편으로는 숙박은 물론 식사를 해결할 만한 변변한 장소가 없었다.

그때 짜낸 묘안이 잠자리는 농가를 활용하는 방법과 식사 장소는 나무숲이나 풀밭 어디나 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이후 마을회의를 통해 팜스테이 민박으로 23농가가 참여했다. 특히 민박은 여성이 주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라 모든 농가 대표를 여성 중심으로 해 섬세함과 부드러움으로 찾아오는 방문객을 정감 있게 맞이했다. 자연스레 민박농가로 구성된 합전마을 팜스테이 대표를 내가 맡게 돼 지금까지 이끌어오고 있다.

그 결과 많은 사람이 찾아와 만족하는 농촌 성공사례로 여러 차례 우리 마을이 매스컴에 소개돼 농업관련 연구소와 대학에서 사례발표 요청이 쇄도했고, 벤치마킹하려는 사람들의 방문이 이어졌다.

덕분에 2001년에는 ‘그린투어’ 부문으로는 처음으로 내가 ‘신지식인장’을 받게 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해 8월3일, 전국그린투어 현장설명회가 농림부(농림수산식품부의 전신) 장관을 모시고 합전마을의 아리랜드 농장에서 열렸다. 농촌에서 땅의 소산물로만 소득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둘러싸고 있는 자연환경까지도 농가의 소득자원이 될 수 있음을 세상에 알렸다.

그렇게 유명해지기 시작한 합전마을은 2001년 행정자치부의 아름마을사업 마을로 선정되었고, 2002년에는 정보화마을로 뽑혔다. 전국의 마을가꾸기 경진대회에서는 우수상을 받았다.

그때 상금의 일부와 농가 부담을 합해 30여명의 마을 주민은 일본에서 마을 가꾸기를 가장 잘한다는 아지무지역으로 4박5일 연수를 떠났다. 아지무에서 민박하며 머물렀던 집은 백년 된 전통가옥으로, 그곳을 다녀간 사람들의 사인이 방안 가득 붙어 있었다. 나는 ‘백년의 기적을 이룩한 대한민국 충남 서천군 마서면 남전리 합전마을 주민들이 다녀가다.’라고 썼다. 우리 마을이 백년 안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찾고, 정부에서 주목을 받으며, 보란듯 상을 받았던 일이 있었나 싶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반드시 전 세계에 널리 알려지는 합전마을을 만들자고 다짐했다.

겹경사가 이어졌다. 농림부가 선정하는 ‘서천여성농업인센터’를 유치하게 된 것이다. 여성농업인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새댁이 들어와서 살기 좋은 마을’ 만들기를 목표로 정했다. 아이들 기르기가 열악한 농촌에서 마음 놓고 농업에 종사할 수 있도록 보육과 방과 후 교육을 맡았다. 올해로 8회째 쌀사랑·농촌사랑 글·그림대회를 개최해 농촌사랑에 대한 청소년의 의식을 고취시키고 있다. 여성이 지역 발전의 지도자로 나설 수 있도록 리더십과정, 마케팅과정도 개설했다. 그리고 여성농업인의 역량 강화 교육과 고충 상담을 위주로 상담실을 운영했다. 농외소득을 올릴 수 있는 방안으로 농산물가공교육을 주도하고 지역의 축제문화를 뒷받침하는 등 여러 역할을 해내고 있다. 이러한 일들이 논문으로 발표되고, 일본의 엔에이치케이(NHK) 방송사에서도 달려왔다. 대한민국 여성농업인의 역할 변화를 위주로 취재하고 팜스테이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 전 세계에 위성으로 방영돼 일본마을과 교류를 갖는 계기도 되었다.

그러나 ‘호사다마’라는 옛말이 하나도 그르지 않다는 것을 곧 깨닫게 됐다. 의욕만 앞서 갈등을 일으키는 일들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마을발전사업 추진 과정에서 생긴 응어리들이 사업이 진행될수록 의견차가 벌어지면서 곤혹스러운 일들이 일어났다. 피폐해지는 내 모습을 내가 염려할 지경이었다. 오직 마을을 위한다는 일념으로 앞만 내다보고 일만 했는데, 색안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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