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팜

쇼핑몰 검색

#2023   #2024   #사과   #곶감   #오디   #고구마   #간송정  

자유게시판

3대농업수기 공모전에 아리랜드 이야기가 최우수상 수상!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정성천 댓글 1건 조회 1,948회 작성일 16-11-30 23:15

본문

20161130231409.jpg

농림수산식품부 주최, 농림수산식품교육문화정보원 주관 3대농업종사자 수기공모에
할머니와 부모님 그리고 우리의 이야기가 수기공모전 최우수상에 뽑혔습니다.
아래 원문을 올립니다.



오토바이타는 할머니의 꿈

우리 할머니는 한 때 오토바이를 몰고 다니는 소문난 지역 유명인사다. 이름하야 오토바이 타는 할머니. 서천장날, 장항장날, 때론 수시로 하얀 헬멧을 쓰고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지금이야 운전하는 할머니들도 계시지만, 30여 년 전에 오토바이로 동네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니는 여인이 있었다는 것을 상상해 본다면, 모든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을만하겠다. 왜 그렇게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셨는지, 여장부라는 별명이 싫지는 않으셨는지 물으면 할머니는 그저 웃기만 하신다.
할머니는 6.25 전쟁 때 북한에서 피난 온 할아버지를 만나 지금 농장이 있는 곳에 정착하셨다. 이북에서 온 4명의 배다른 고모와 할아버지를 만나 낳은 1남 6녀의 자식들을 키우시며 할아버지를 도와 ‘아리랑농장’을 가꾸셨다.
할아버지는 농업학교를 졸업하시고 농장에서 배추와 무, 수박 등의 씨앗을 채종하는 일을 하셨다. ‘농사박사’라고 불릴 정도로 농사를 잘 지으셨고, 농장이 커지며 한때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50명도 넘을 정도로 일꾼이 많았다. 할머니는 그 일꾼들을 매일같이 밥을 해먹였다고 한다. 지금 밥사발은 그때의 간장종지 같다며, 국그릇 같은 밥공기에 고봉으로 쌓아 올린 쌀밥을 한 그릇씩 뚝 딱 해치우는 일꾼들을 배불리 먹이셨다. 수박씨앗을 채종할 때면 동네사람들을 모두 불러놓고 수박을 맘껏 먹게 하셨다. 배고픈 시절 공짜로 수박으로 먹으로 온 사람들이 농장이 북적였을 것을 상상해보면 그것 또한 장관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모은 수박 씨앗이 세 가마가 넘었다고 하니, 공짜수박 먹으러 갔다가 배가 산만해진 동네사람들도 한 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렇게 채종사업으로 돈이 조금 모이면 할아버지는 땅을 사셨다고 한다. 그것이 산이든, 밭이든, 모래사장이든, 값 흥정도 없이 땅을 무조건 사셨다. 돈이 없어도 무조건 말이다. 땅을 사준다는 소문이 나자 땅 파는 사람들이 우리농장에 제 집 드나들 듯이 했다고 한다. 할머니는 11명의 자식을 키워낼 생활비는커녕 땅 사는데 들어가는 돈을 빌리느라 동네를 다 돌아다니셨다. 앞동네, 뒷동네 어느 때는 멀리 읍내도 다니셔야 했다. 이미 돈을 빌려간 집에 또 돈 꾸어달라고 들어가자 벌써 돈 갚으러 왔냐며 반겼다는 곳도 허다했다고 한다. 일꾼들 밥도 챙기며, 자식 양육도 하며 땅값을 빌리러 다니시면서 시간을 절약하고자 오토바이를 타기 시작하셨다고 한다.
할머니 말씀에 할아버지는 땅이 제일 소중하다고 하셨단다. 또 ‘서울의 땅 한 평과 이곳의 땅 한 평은 맞바꾸지 않겠다.’고 아버지를 통해 생전 할아버지의 말씀을 듣는다. 땅을 모아 농민학교를 세워 배고프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농사를 가르치는 게 평생 꿈이셨다며, 할머니는 이런 할아버지의 꿈에 반해 두말하지 않고 혼인을 약속했다고 하셨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농민교육을 위한 터전을 일평생 마련해오시면서 ‘뜻을 같이하는 자가 가족이고 형제이다’라는 말씀을 자녀들에게 수 도 없이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회갑잔치에 고모들과 아버지를 불러 모으시고 중대발표를 하셨다고 한다. 그것은 우리농장 초입에 세워진 시비로 기록되어있기도 한데, 바로 ‘이 땅이 세계의 중심 되게 하소서’라는 비전이었다. 할아버지는 이 꿈을 평생 기도해 오시면서 땅을 모으시고 농민학교를 세우실 계획이셨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 회갑연의 중대발표 이후 농장으로 들어오셨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너무 허무맹랑하고 비현실적인 꿈이지만, 회갑의 나이에 그런 꿈을 공유하신 할아버지의 모습에 놀라우면서도 뜻을 따르겠다고 결심하셨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갑자기 돌아가셨을 땐, 고모님들은 땅에 대한 상속권을 아버지에게 넘기시며 할아버지의 뜻을 이어가길 원하셨고, 아버지는 아리랑농장에 시비를 세워 그 뜻을 이어가고자 하셨다. 그 시비의 내용은 이러하다.

나 이땅에 한 씨알을 심었네
우리의 농업과 생명을 보전할
난 기도했네
이 땅이 세계의 중심이 되길
그리고 바라보네
언젠가 이루어질 아름다운 세계를

이렇게 할아버지가 닦아놓으신 터전에 꿈을 실현하기 위해서 농사만 지은 것은 아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는 농장과 농촌을 도시와 함께 상생하는 곳으로 만들고자 하셨다. 마을사람들과 공동체를 만들어 지속가능한 농촌을 만들고자 노력하셨다. 농산물 꾸러미를 트럭에 싣고 서울로 올라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팔아보기도 하며 어려운 현실을 헤쳐 나가고자 생각한 것이 ‘찾아오는 농촌 만들기’였다. 농장에 동백나무와 수선화를 가꾸며 점차 아름다운 농장이 만들어졌고 지금까지 21년째 동백꽃 수선화 축제를 열고 있다.
아버지는 원예학 석사를 하셨고, 어머니도 농촌에 시집오셔서 학구열을 불태우시어 농촌 개발 분야 박사학위까지 취득하셨다. 나는 한국농수산대학을 졸업하고 방송통신대학 농학과를 졸업하여 학사학위까지 취득을 했지만 우리가족 최저학력자이며 아직까지도 아침에 눈이 일찍 떠지지 않는 서투른 7년차 농부이다. 조금 핑계를 대자면, 보름이면 100일이 되는 딸을 돌보느라 그렇다고 둘러댈 수 있다. 이제 4대가 함께하는 농장이다.

우리 농장의 이름은 더 이상 아리랑농장이 아니다. 일평생 땅을 사랑하신 할아버지의 뜻에 따라 ‘아리랑의 땅’을 담은 아리랜드로 개명하였다. 그 넓은 채종농지에는 동백나무가 무성하기 들어서있고, 봄이면 축제가 열린다. 유치원부터 고등학생까지 교육농장 프로그램으로 체험도 오고, 우프(WWOOF)프로그램으로 일 년에 스무 명 이상의 외국인 우퍼가 농장에 머물며 농사일도 돕고 문화교류도 한다. 아버지는 우퍼들 에게 아리랜드가 가진 꿈을 이야기한다. ‘세계의 중심이 어디겠느냐? 바로 당신이 서 있는 이곳이 아니겠는가!’ 하며 말이다. 농장에 다녀간 우퍼들은 아리랜드의 꿈을 품고 세계각지에 퍼져있고 지금도 아리랜드의 친환경농산물 수확 사진에 댓글과 따봉 표시를 남기며 SNS를 통해 교류하고 있다. 허무맹랑하기만 했던 우리 가족의 업이 오토바이 타고 다니신 할머니의 일평생 헌신으로 조금씩 이루어지고 있다.

오늘 이른 아침 쌀쌀한 날씨에도 할머니는 어김없이 엉덩이에 붙이는 방석과 장갑, 호미 한 자루 들고 농장 곳곳의 풀을 매러 나가신다. 어느 손님은 할머니를 보시고 여전사 같다 하셨다. 맞다. 전사의 기질을 지니셨다.

할머니가 타고 다니시던 오토바이는 이제 나의 애마가 되었다. 비록 구순의 나이로 더 이상 오토바이를 타실 수는 없지만, 온 산과 들을 휘젓고 다니시던 여장군의 기세는 아직도 여전하시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세운 ‘세계의 중심’이란 꿈은 2대 ‘평화의 동산’을 만드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통해 이어져 오고, 3대인 나와 아내는 ‘행복의 샘’이 넘치는 농장을 만들 것이다. 이제 자라나는 4대에게도 비전의 공유는 계속되어, 언젠가 이루어질 아름다운 세계를 볼 것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없음


TOP

상품이 장바구니에 담겼습니다.
바로 확인하시겠습니까?
쇼핑계속하기장바구니